지행합일(知行合一)은 중국 명대(明代) 중기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주창한 말귀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하나라는 그의 말은 몸과 마음이 다로 노는 범부들에게는 너무 까마득하다.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자가 떨리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로 물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 아닐는지요.” 스승이 무겁게 대답했다. “아직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다만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양명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과 편지를 모아 엮은 <전습록(傳習錄)>에 나오는 대목이다.
양명학자들은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왼쪽으로 가거나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가는 당대의 유학(儒學) 지식인들에게 몸서리쳤다. 입으로는 도덕군자를 말하며 속으로는 입신양명만 도모하는 성리학자들에게 신물 냈다. 그래서 유학이 세상의 근간이 되었을 때도 양명학자들은 변방을 떠돌았고, 밖을 치장하기보다는 안으로 수행하는데 힘썼다.
조선후기의 양명학자들은 강화도에 은거했는데, 그들을 강화학파라고 부른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 선생은 그 태두가 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구한말 3대 문장가 중에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건창(李建昌)과 한말 계몽 애국운동가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정인보(鄭寅普) 선생 등이 모두 양명학에 그 사상적 뿌리를 두었던 이들이다.
단재 신채호는 1927년 신간회 발기인 대회에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겠으나 노예의 특색이라면서 절규하듯 연설했다.
도성을 근거지로 하던 권력자들이 손익(損益)과 권도(權道)를 빙자하여 시세에 편승하고 있을 때, 조선 땅에 있던 양명의 후손들은 왕조의 변방을 낮은 포복으로 기어 넘으며 그렇게 배우고 익힌 것을 몸으로 갈아냈다.